지난달 19 일 오전 르완다 수도 키갈리. 가탱가 지역 주민 센터 앞에서 한 여성이 16 년 전 일어난 '대학살'을 증언하기 위해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합니다. 그는 "나는 마을 사람들이 죽어 갔던 과정을 똑똑히 지켜봤다는" ""고 말했다가 오늘 증인으로서 당시 벌어졌던 일을 그대로 밝히겠다이 며.
재판의 격식은 따지지 않는 듯했다. 이날 열린 항소심 재판 에선 법복 입은 판사 대신 옆 마을 주민들 중 명망있는 이들이 법관 역할을 맡았다. 재판 장소도 주민 센터 내 30 ㎡ 정도 크기의 소강 당이었다. 이웃 마을에서는 이날 판사가 배탈이 나서 재판이 미뤄졌다고했다. 이것이 르완다의 지역 사회별로 이루어지는 1994 년 제노 사이드 (인종 말살) 전범 재판 '가차차'의 모습이었다.
지난달 19 일 르완다의 가탱가 지역 주민 센터 밖에서 수의를 입은 가차차 재판 피고인들이 재판을 기다리고있다. 키갈리 | 이청솔 기자
르완다는 당시 후투족 정부와 투치족 반군 사이의 내전으로 인구 1000 여만명 중 80 만명 이상이 숨지는 비극을 겪었다. 사망자는 대부분 소수 민 족인 투치 족이었다. 누구든지 가족이나 친척 가운데 1 명 이상은 당시 내전의 희생자가 됐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전날까지도 이웃에 살던 사람들, 친구, 직장 동료들이 하루 아침에 적이되어 죽고 죽이는 살인극을 벌였다. 내전에서 이겨 정권을 잡은 투치족 정부는 두 민족의 화해없이는 르완다를 다시 세울 수 없다고보고 과거사 청산에 매진하고있다. 아프리카 곳곳에서 내전과 학살, 인종차별의 아픈 과거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옛 상처를 봉합하고 치유하는 일은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이 안고있는 과제다.
인종 말살 이후 16 년, 화해는 먼 길
이 정부는 9000 개 마을에 전통적 재판 제도에서 빌어온 가차 차를 설치하고 마을 공동체 구성원들이 참여하게했다. 인종 말살을 계획적으로 주도하지는 않았더라도, 가해자들을 모두 법정에 세워 진실을 밝혀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가차차 재판에서 징역 형을받은 이들은 모두 형량대로 복역을해야한다. 과거사 청산의 모범 케이스로 꼽히는 가차 차는 2008 년까지 대부분의 재판이 마무리되고 현재는 항소심만 진행 중이다.
르완다에는 교육과 분쟁 조정을 담당하는가 '화해위원회'라는 것도있다를 통합. 대학 입학을 앞둔 모든 학생들은이위원회에서 여는 '인간도 (연대) 캠프'에 들어가 1 ~ 2 달 동안 르완다 현대사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2005 년에는 성인들을위한 교육 과정인 '이토 레로 (부족식 집단 교육)'도 생겨 이미 16 만명이이 과정을 거쳐 갔다. 르완다는 또 해마다 4 월 초 2 주를 '제노 사이드 추모 주간'으로 지정해 각종 행사를 치른다. 마을 주민들은이 기간 한 자리에 모여 당시 벌어졌던 일들을 회고하고는 '는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는 의지를 다진다를 다시.
내전에서 밀려난 후투족 강경파들은 여전히 이웃 콩고 민주 공화국 등에서 반군 활동을하고 있지만 르완다의 과거사 청산은 성공적이다. 이 나라에서는은 "족 이냐를 후투족이냐"를 묻는 것이 금지됐다 투치. 외국인이 궁금증으로 그런 질문을 던지면 "은"는 모두 친구가 우리 답이 돌아온다는라는. 정부도 민족에 따른 차별 대우를 헌법으로 철저히 금지하고있다. 니코데메 부과 바리 르완다 국립 대학 정치학과 교수는 "투치 족인 폴 카가메 대통령이 후투족도 적절히 기용했기 때문에 사회가 안정될 수 있었다"는 평가했다를 고.
그럼에도 과거사 청산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에는 16 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부과 바리 교수는는 "정부가 많은 노력을했지만 정신적으로 완전한 화해를 이룬다는 건 쉽지 않은 일" ""고 말했다를 매년 제노 사이드를 회고한다는 것 자체가 여전히 문제가 많다는 걸 보여주고있다가 이라며. 이 때문에 르완다 통합 화해 위는 임시기구가 아닌 상설기구로 창설됐다. 통합 화해 위의 찰스 무치사는은 "는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다가 화해. '오늘로 모두 끝'이라며위원회의 문을 닫을 수는없는 일 "을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금지하자 '프랑스어 사용층'(후투족), '영어 사용층'(투치족) 등 종족을 가리키는 일종의 '암호'가 등장하는 등 진정한 화해는 도리어 늦어지고있다는 시각도있다 .
백인 정권 무너져도 사회 모순 여전
남아 프리카 공화국은 94 년 아파 르트 헤이트 (흑백 분리) 체제가 무너진 뒤 '진실 화해위원회 (진실과 화해위원회)'라는 과거사 청산 모델을 만들었다. 백인 정권에 인권을 유린당한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불러내 증언을 듣고 가해자가 적극적으로 진실을 밝힌다고 판단되는 경우 죄를 '사면'해주는 것이다. 이 모델은 이후 아르헨티나, 칠레, 동티모르, 가나, 한국 등으로 퍼져나갔다. 진실 화해 위는 사면을 신청한 849 명 중 7112 명을 대상자로 선정하고 98 년 임무를 마쳤다. 남아공은은 13 %의 백인이 나머지 인종 전체를 통제하는 억압적 구조에서 내전이나 보복 등의 큰 후유증없이 민주적 체제로 옮겨간 것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진실 화해 위가 화해에 초점을두고 사면 권을 남용하는 바람에 반인권 범죄자들을 너무 쉽게 용서했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넬슨 만델라 등의 흑인 지도자들이 수감됐던 케이프 타운 앞바다 로벤섬 감옥은 이제 박물관으로 탈바꿈해 관광객들을 맞고있다. 백인이지만 아프리카 민족 회의 (ANC)에 가입해 아파 르트 헤이트 반대 운동을 벌였던 리처드 화이팅은 지금 로벤섬 박물관에서 일하고있다. 화이팅은 백인 정권 때 징집을 피해 보츠와나로 망명했다. ANC는는 이제 집권당이 됐고 화이팅은 아파 르트 헤이트 자료 수집과 조사 · 정리를 맡고있다. 그는 "남아공 진실 화해 위의 활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는"고 평가했다를.
반면 과거사 청산이 형식에 그치면서 모순된 사회 구조를 개선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도있다. 케이프 타운 대학 사회학과의 멜리사 스테인 교수는 최근 백인 농장주 외젠 테르 블랑슈가 농장 노동자들에게 살해된 일을 예로 들었다. 그는 "대농장을 소유한 백인 농장주가 흑인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구조는 그대 로다"라며 "는 사회가 지난 16 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남아공 지적했다를 고.
과거사와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있는 르완다와 남아공 사람들은 모두가 '들의 역할'을 강조했다를 정치인. 벨기에 식민 정권이 떠난 후 후투족과 투치 족의 갈등이 본격화됐던 르완다를 비롯해, 아프리카 대부분 나라의 내전 뒤에는 오랜 역사적 배경이 숨어있다. 그 갈등의 골을 메우는 것이 쉽지 않지만 '좋은 나라'를 만들고자하는 정치인들의 의지에 따라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르완다 통합 화해 위의 찰스 무치사는 "지도자들이 특정 집단이 부를 독점하는 것을 막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갈등을 해소하려 애쓰면 문제는 사라진다"고 말했다. 남아공에서는 백인 정권이 무너 진지 16 년이 지났지만 흑백 정치인들이 여전히 인종 갈등을 권력 강화에 이용한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요하네스 버그 대학에서 만난 흑인 여학생은 "흑백간 통합의 정도는 여전히별로 높지 않다"는 ""서로를 증오하게 해 입지를 강화하려는 정치인들이 문제를 며 지적했다가라고.
키갈리 · · 케이프 타운 요하네스 버그 | 이청솔 기자 taiyang@kyunghyang.com
서아프리카의 최빈국 라이베리아와 시에라 리온은 2000 년대 초 내전이 모두 끝나자 과거사 청산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내전의 상처가 너무 깊었던 탓에 실제로는 전범 재판도 자기네 나라에서 치르지 못할 정도로 정부의 정치 · 경제적 기반이 허약하다.
라이베리아 내전의 장본인인 찰스 테일러는 정부를 전복 시키려고 1989 년 코트 디부 아르에서 반군을 창설했다. 이듬해 사무엘 도에 대통령이 살해 당하면서 라이베리아는 내전에 들어갔고, 결국 15 만명의 사망자를 남기고 96 년에야 끝났다. 97 년 대선에서, 국민들은 테일러가 낙선하면 다시 내전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에게 표를 던졌다. 당시 테일러의 선거 슬로건은은 "그는 내 부모를 죽였지만 나는 그에게 표를 준다"였다. 결국 테일러는 국민들의 두려움에 기대어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다.
테일러는 다이아몬드를 노리고 이웃 시에라 리온의 내전도 부추겼다. 그의 지원을받은 시에라 리온 반군은 다이아몬드 광산 대부분을 점령했다. 92 쿠데타로 시작된 시에라 리온 내전은 년 10 년동안 이어졌다. 반군은 내전 기간 집단 강간 · 학살 · 아동 살해 등 끔찍한 범죄들을 자행했다. 특히 소년병들에게 마약을 줘가며 민간인들의 팔을 절단하도록 한 만행으로 악명을 떨쳤다.
2000 년대 들어 라이베리아에서 테일러에 맞선 내전이 다시 일어났다. 테일러는 물러난 뒤 나이지리아로 도망쳤다가 2006 년 체포됐다. 같은 해 라이베리아에서는 아프리카 첫 여성 국가 원 수인 엘렌 존슨 - 설리프 대통령이 당선돼 재건의 희망이 고조됐다. 그러나 라이베리아 민주 정부는 테일러의 귀국이 몰고올 정치적 불안을 이유로 테일러를 시에라 리온으로 이송했다. 시에라 리온 특별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도 역내 불안이 고조될 수있다는 우려가 커지자 유엔은 그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 형사 재판소 (하는데 ICC) 형무소로 이감했다. 2007 년 이후 특별 법정은하는데 ICC에서 테일러를 재판하고있다.
라이 베리 아나 시에라 리온은 반인도 범죄를 재판할 전문적인 역량과 재원이 모자라, 유엔과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받아 과거사 청산을하고있다. 르완다의 경우도 일급 전범들에 대한 재판을 담당하는 르완다 국제 형사 재판소는 자국 내에 설치하지 않고 이웃 탄자니아에두고있다. [http://ttalgi21.khan.kr/2832 ]
이청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