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대한 다른 생각 하나 / 문철수
1.
시가 그림처럼 그 아름다움이나 현상만을 그려낸다면 나는 그에게 시인이다 라는 호칭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 물론 이 발언이 미술이나 그림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양해 바란다 -
시는 수없이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거치면서 몇 가지 그 역할을 담보해 왔다. 그 역할에 대하여는 많은 문헌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현대의 문학가들이 자주 인용하는 사례들이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그것이 답이다 라는 오류만 인정할 수 있다면 나도 결코 아니다 라고 말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 시의 역할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강조하며 우리 시공의 시인들을 예로 들어 나름대로 시가 지향해야 할 부분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자 한다.
그 첫째는, 세상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글로 담아내는 일이다. 이것은 어떤 시 경향을 가졌건 누구나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그 아름다움만 추구하다 보면 시의 깊이 또는 새로운 시각이나 해석에서 멀어지고 입에 맞는 단어만 나열하는 글에 빠지는 오류도 범하게 된다.
둘째로 현상이나 사물들에서 새롭게 얻어지는 지혜와 사유에 대한 피력일 것이다. 그것들을 직접적으로 나타낼 수도 있고 은유적으로 묻어 둘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이미지들을 끌어다 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신을 보지 않아도 묘나 비석이 있으면 그안에 당연히 시신이 있을 것을 아는 것처럼. 그러나 때로는 빈 묘지도 있는 법이다.
세째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적어내고 직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을 우리는 참여시다 라고 부르기도 하고 일부 서정주의자들에게서는 시도 아니다 라는 비판을 받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네째는 전혀 객관물과 상관없는 이미지와 단어들을 조립하여 오로지 지은이 자신만의 생각 속에 고립되어 있는 시가 있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그런 시들에 대하여도 기막힌 정신분석학적 잣대로 읽어내는(해설) 것을 보았지만 기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글이라기 보다 자기내면의 복잡한 헝클어짐을 의미 없이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2.
개인적으로 나는 완성도 있는 시란 이 네 가지가 잘 조합되어진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시의 형식이나 구성이나 리듬이나 따져야 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많은 잣대를 다 가지고 어떤 시를 재단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답을 찾기도 어려워 도리어 비판의 기능이 저하되고 시의 효용성마저 떨어지게 될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어 그 부분은 제외하고 품은 뜻으로 보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이글도 그런 의미에서는 반족짜리 글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겠다.
여기서 한병준, 옥다혜, 고현주, 박수림의 시적 경향을 짚어보고 바람직한 시의 방향성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한병준 시인의 시는 시적 장치가 뛰어나고 남다른 표현의 능력이 있는 반면 이미지를 그려내는 능력에 비하여 주제의 함축성이나 이미지를 주제에 접근 또는 일치시키는 능력에 있어서는 아직 미숙한 부분이 보인다. 그림은 그리지만, 아름답게는 느껴지지만 또한 아쉬움도 크다 고 할 수 있다. 반면 옥다혜 시인의 시는 현상을 꿰뚫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드러내지 않고 전하는 힘이 느껴진다. 다만 기교나 시어의 선택이 더 많은 훈련을 요구한다 할 수 있겠다. 고현주 시인의 시는 서술 없이 현상 속에서 일어나는 철학적이고 구도적인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또는 현상을 그대로 말함으로써 뜻을 전하려고 하다 보니 시적 장치가 부족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더하여 언어의 혼란을 시에 이용하는 것 또한 단점으로 느껴진다. 박수림 시인의 경우는 이전 세 시인과는 전혀 다른 경우에 해당 한다 볼 수 있다. 시에서 나타나는 모든 대상물과 현상이 자신의 삶과 끈끈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을 삶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또는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다 보니 시를 바라보는 습성이 대체로 무거운 통증(증상)을 겪게 된다.
예술가는 안경으로 세상을 보는 법보다는 망원경으로 보듯 세상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루카치의 표현대로라면 예술은 인류의 자기인식 이라고 결론 내린다. 시인은 예언의 능력을 소유한 자들이다. 기계적이고 논리적이며 학술적인 체계로 부터 얻어진 능력이 아니라 자연으로 부터 선물처럼, 자연의 일부분으로 인정되어져 나오는 감각적 능력이 있는 자들이다. 그러한 능력을 피사체에서 얻어지는 묘사로만 끝낸다면 그것은 단지 글로 그린 그림에 불과하고, 현란한 말장난이나 자기 한탄에 그친다면 그것은 시인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며, 자신에 대한 부족함을 망각하고 아집과 고집으로 시적 장치를 삼는다면 자연의 선물을 거부한 자신을 독재하는 독재자에 불과할 것이다.
위 네 명 시인의 이름을 거명한 것은 그들의 각각의 장점 때문이다. 아마도 그 장점들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3.
더불어 시를 가르치는 시인들은 어쩐 일인지 끝없이 시에 있어서 이미지의 중요성만 강조 한다. 물론 세상의 잣대가 되는 공모전에서 당선의 경향이 그렇기에 그에 맞는 강의를 하겠지만 - 이건 다분히 그들을 향한 의도적이 비판이다.- 그로인한 폐해로 시단의 다양성을 해치고 시인들을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만들어 간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교회에서 목사가 우상이 되고, 절에서 승려가 우상이 되며, 연애에서 상대가 우상이 되듯 시에서 스승이 우상이 되고 아니 스스로 우상이 되고자 하며 획일적 신앙의 틀 안에 시인들을 가두려 한다면 이미 시인을 보는 눈을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주관적 입장에서 완성도 있는 시란 객관적 현상물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로의 해설 같은 표현과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이나 삶의 지표 또는 지각 등이 물처럼 녹아들어 읽는 이의 가슴속에서 투명하지만 딱딱한 얼음처럼 일어설 수 있는 시가, 그리고선 다시 물이 되어 온몸으로 스며드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생각도 시의 다양성을 해치는 발언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시는 시 스스로 틀 안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시는 자유롭기를 원하고 떠돌기를 원하며 책속에서 탈출하기를 바란다. 그저 흘러가기를 원한다. 사람이 아니 시인이 시를 가두고 틀을 만들며 시를 아프게 하고 수혈하기도 한다. 그건 시인 자신들의 욕심 때문일 것이다. 자유롭지 않은 영혼에서 나오는 자유롭지 않은 시, 그 시를 자유롭게 읽히고자 한다면 그것은 시인이 세상을 기만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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