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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시론, 기타

옥다혜 시인의 ‘미치도록 대추나무는’ 을 읽고 / 문철수

by 文喆洙 2010. 7. 15.

옥다혜 시인의 ‘미치도록 대추나무는’ 을 읽고  /  문철수


 

  나는, 최근 며칠 동안  옥다혜라는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인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부쩍 관심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단지 그것이 옥다혜라는 여자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의 글 하나하나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깊은 맛을 내는 묘한 구석이 있어서라고 말하면 정답일까?   아니다.  그 궁금증의 근본은 그 제목 하나하나가 가져다주는 단순한 그림을 저리도 제대로 파악하고 해부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부분에 시선이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한 관심은 갖지 않아도 괜찮은 것인데.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한편의 소설을 준비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자료들을 모으기 위하여 책을 뒤져 공부하며,  배경이 되는 곳을 수없이 답사하고  그곳 사람들을 만나 면접하며 박사학위를 따기 위한 학자들의 노력 이상으로 땀을 흘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작품의 이해도를 높일 뿐 아니라 완성도를 높이는 일이며 독자들에게 사실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런 땀과 노력이 작가의 문학적 바탕과 소양,  작품을 만들어 내는 테크닉과 잘 비벼질 때에 명작이 탄생하는 것이다. 나는 옥다혜 시인의 작품 몇 점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앞서 운문자작방에 올린 몇 작품 중 ‘수수꽃다리 넝쿨벽지’ ‘ 야생동물출현구역’과  최근작 ‘미치도록 대추나무는’에서 특히 그런 느낌을 더 가질 수 있었다. 여기서는 최근작 ‘미치도록 느티나무는’이라는 작품을 중심으로 소회를 발설하려고 한다.  단평인 만큼 우선 작품 전편을 다시 감상해 보자

  

   

가지 끝에서만 이파리 무성해지는 것이

대추나무 미쳐 그런 것이라는데

여름 들어 비비꼬이는 심사 심상찮은 것이

속이 타서 그런 것이라는데


연장이 들지 않아 가구 만들 엄두가 나지 않는 나무

순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고집불통

반들반들 윤나는 이파리들 가려운 듯 흔들 때

한껏 물올랐다고 좋아할 수만은 없는

푸르다가도 어느 순간 바짝 말라 버리는 나무

자양분이 가지 끝으로 다 뻗지 못하게

밑동에 살짝 상처 내주면

미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나무

그렇게 독한 나무도 한 때 시집이라는 것을 가서

양다리 사이 적당한 돌 하나 끼워 주면

그 해 꽃풍년 든다는 나무


미친 대추나무

나잇줄 따라 목리를 쫓다 보니

가지 끝 살리려든 흔적이 있다

요동치며 비튼 심지, 사람처럼 아팠던 상처가 있다  [‘미치도록 대추나무는‘ 전문]



   직설적으로 풀어본다면 1연에서 시인이 말하는 그 병은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약인 테라마이신 이라는 항생제를 대추나무에 구멍을 뚫고 넣어주면 신기하게도 병이 없어진다는 미친년 산발하듯 한 그 병, 일명 싸리병(빗자루병 이라고도 한다)을,  2연의 8행까지는 독특한 대추나무의 생태와 쓰임새에 대하여 시인의 감성을 실어 표현 했으며, 2연 9행~10행은  일명 대추나무 시집보내기 라는 주술적 행위인데 사전적 의미로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 과일나무 가지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놓고 풍작을 기원하는 주술행위’라고 되어 있으며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에는 정초 오시(午時)에 가수(嫁樹)를 한다고 되어 있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단오 때 대추나무를 시집보낸다 하였다. 또한 영동지방은 대보름에 감나무를 시집보내고, 영서지방은 대추나무, 경기지방은 배나무, 호두나무에 '나무 접붙인다.' 며 돌을 끼운다고 한다. 여기서 돌은 남성의 의미한다. 마지막 3행에서는 대추나무의 나무로써의 삶의 굴곡을 이야기 하고 있다.


   다시 그 의미를 필자가 느끼는 대로 해석한다면 1연은 ‘시집못간 노처녀의 심성’에 빗대어 순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2연은 그  ‘고집 있는 노처녀’ 의 삶과 그 ‘노처녀의 병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연에서는 그런 여자에게도 ‘아픈 삶의 역사와 누구도 알 수 없는 아픔’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으로 얘기하면 대추나무도 시집가는데 나는 뭐냐 라는 체념적의미로는 지나칠까?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이야기 하려는 것과 주목해야 할 것은 시인은 대추나무에 대해서 너무나 정확하게 많은 것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부분이다. 앞서 소설가들의 수고와 노력에 대하여 장황하게 이야기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하루 이틀 공부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며 단순하게 안다고 해서 써낼 수 있는 작품도 아니다. 필자가 느끼기에는 시인이 대추나무가 된 듯 착각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질 정도이다. 적어도 이정도의 지식과 그 지식이 -체득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시인의 머리에서부터 가슴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그 느낌으로 적셔져야 글의 묘미가 느껴지고 독자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것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어느 곳 한군데 여자라는 개념 드러내지 않고 써내려간 글에서 애타는 마음을 읽을 수 읽게 한다는 것은 시인이 비록 습작기에 있는 시인이라고는 하나 그 속내가 얼마나 알차게 엮어져 있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작품이랄 수 있다.   필자는 어떤 글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한다면 결코 명작을 만들어 내기란 쉽지 없을 것이다.” 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 작품이 본인의 이야기인지 타인의 이야기인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시인과 시인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대상물과 합일을 이루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몇 작품에서는 무리한 실험을 강행하듯 하는 부분이 보이기는 했으나 유명한 시인들도 그런 오류 속에서 좋은 시를 생산해 낸다. 요즘 시의 경향이 산문적 요소가 강하다고는 하나 시는 언어의 경제성을 외면해서는 존재하기 힘든 문학장르 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옥다혜 시인의 시에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시의 매력이 있다. 좋은 시인의 탄생을 기다리며 감사를 드린다.  [시인, 시공 동인회장]      ---  동인카페에 올려놓은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