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문학/시론, 기타

전하라 시인의 "발가락 옹이"를 읽고

by 文喆洙 2015. 2. 18.

 

전하라 시인의 "발가락 옹이"를 읽고....

 

 

타인을 웃기는 것을 직업으로 가진 개그맨들은 정작 자신의 집에 들어가서는 웃기질 않는다고 한다.

나는 언젠가 나의 웃음에 대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자 뼈저리게 울어본 사람만이 타인 앞에서 웃을 수 있다"고 말 한 적 있다.

사람이 어찌 항상 즐거울 수 있는가...

 

시는 모름지기 그 시를 쓴 시인을 닮아 있다. 시인의 성정과 시의 색깔은 분명히 맥을 같이 한다.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면  지극히 특별한 예외이거나 시인이 보여지는 자기 성정을 감추거나 위장했을 것이다.

 

전하라의 시편들에선 유독 사물의 의인화 작업이 자주 일어나고 무생물의  생물화 작업 또한 잦다.

기본적으로 밝아보이지만 그건 천성이 아니라 환경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습관화 된 2차  성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슈퍼우먼이  될 수 밖에 없는 삶의 과정에서 스며든 홀로라는 쓸쓸함을 극복하는 방법이 시에 까지 녹아든 것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

 

 

" 벌판에 커다란 플라타너스 한 그루 서 있었죠

나무는 늘 가슴이 휑 했죠

구멍 숭숭 뚫린 나무는 누군가 그리웠죠

아무리 큰 그늘을 가진 그라도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죠

어느 날 새떼들이 날아왔죠

나무의 가슴은 노래로 채워졌죠

 

늘 날개를 저어야만 하는 새들은

어디선가 쉬고 싶었죠

한 참 날다보니 플라타너스가 보였죠

새들은 나무 품으로 숨어들었죠

나무는 새 대신 날개를 푸덕여주었죠

새들은 앉아서도 여전히 날 수 있죠

 

나무는 새의 즐거운 노래교실

새는 나무의 푸르른 시냇물이죠

 

[발가락 옹이  중 '나무와 새' 전문]

 

이 시는 단지 그 중 한편에 불과하다.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운명을 뜻한다는 사람 인 자에  어떤 한 획이 빠진다면 세워도 아라비아 숫자 '1'이고 뉘여도  한자로 '한 일' 자가 되는 사람 인 자가 불안하지 않게 일어서기 위해서는  대신 할 무언가를 찾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시인에게는 시가 아니었을까.

 

그 대신할 무언가, 늘 가슴이 휑한 구멍 숭숭 뚫린  나무에게, 그저 잎만 키우고 떨구기를 반복하던 나무에게 새는 허공을 향해 자유의 날개짓을 대신 해 줄 수 있는 한 쪽이었던 것처럼 그의 삶에 있어 시는 나무에게 있어 새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머물 수 밖에 없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지만 첫시집 상재를 축하한다. 다만 기본적으로 시는 노래이고 노래에 있어 운율은 거부할 수 없는 요건인데  시대적 흐름일까 이 시를 제외한 많은 시편에서 단어들을 아끼지 않는 산문적 습성이 몸에 배어있는 것 같아 나름 아쉽다는 생각이다.

 

서천을 찾아오는 봄도 하루에 몇 번씩 오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섞여 놀다보면 결국 봄의 한가운데 있겠다.

 

전하라 시인의 열정적인 삶에 감사한다.

 

2015. 2. 12. 19: 05 바람이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