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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시론, 기타

노창재 시인 첫시집 '지극'

by 文喆洙 2015. 12. 1.

 

봄비

 

           노창재

 

 

밭고랑 청보리

기지개 켜든 말든

가지 끝 복사꽃 몽우리

맺히든 말든

첫돌 다가오는 아기

걸음마 떼든 말든

혼사 날 잡아놓은 숫처녀

밤잠 설치든 말든

종일을 사부작사부작

하염없이 내리는

능청

 

 

 

커다란 키  넓데데한 얼굴  잘 생긴 모습  한쪽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그의 능청을 간과하기란 쉽지 않다

연을 맺은지 얼마 되지 않는 내가 그의 시집 첫머리에 수록된 봄비라는 작품 속 그 능청이 단지 시가 아니라 어쩜 그의 삶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세상 모든 길들을 돌아서 가기까지....예까지 온 건 슬픔이란다"(그의 시  '꽃' 중에서)라고 얘기 하면서도 그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홀로 우포의 늪가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삭였을까

삭힌 시간만큼 누군가의 앞에서는 즐거웠으리라

 

"실눈썹도 힘겨워 실눈"(그의 시 '새싹에게' 중에서) 뜨면서도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려 애쓴다는 것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느껴져 온다

그중 백미가 시인의 삶의 방향이나 철학일 법한 '백수론'이라는 작품이다

 

 

호랑이가 앞이마에 王자를 새기고도

바람에 수염을 맡기며 홀로 외롭듯

감춘 이빨. 감춘 발톱과 같이

무시로 드러내지 않는 법

뒤를 어슬렁거리되 기품을 잃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골짜기를 포효하되 주변을 다치지 않게 하며

먼발치에서 바라보아도 항상 위엄과 기백이 서려

배경을 따뜻하게 하는 풍경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고프고 주린 날이 오래오래 머물더라도

맑고 형형한 눈빛으로 견뎌 낼 줄 알아야 한다

눈발 휘몰아치는 매서운 들판에서도

옷을 걸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선의의 경쟁을 피하지 않고

다수의 안녕한 질서 속에서

언제나 몸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정의의 함몰, 위선과 병폐

횡횡한 골목을 마주치게 되면

그때는 가차 없이

이빨과 발톱을 세워 분연한 일전을 불사하여야 한다

 

다만, 나아 간 길

한 점 흔적도 없이

길인 줄도 모르게 하여

 

-백수론 전문-

 

 

누가 받아주든 말든 자기 할 말을 하고 살아온 날들과 다시 부딪혀 헤쳐 나가야하는 날들을 대하는 그의 각오가 드러나 있는 이 한편이 온전한 시인의 삶이길 기대한다

 

다시 한번 첫시집 '지극'  상재를 축하합니다^^

 

(문학의 전당 시인선 노창재 '지극')